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 초기 왕권강화와 조선 기틀을 잡는 데에 올인했던 임금입니다. 그만큼 권력의 승계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세자에게 방해가 될 것 같은 세력을 모두 죽입니다. 심지어 본인 처가 식구들까지 말이죠.
그런데, 태종이 세자로 삼았던 양녕대군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태종은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4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사실 초이스가 있는데, 양녕대군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 양녕대군의 잘못된 생각
제가 어릴 때 읽었던 얇은 역사책에서는 양녕대군이 호탕하고 권력에 뜻이 없어, 학식이 충만하고 성실한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난봉꾼을 자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실제 태종실록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양녕대군은 누구보다도 임금이 되기를 원했는데, 진정한 임금보다는 임금의 권력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는 태종의 장자였고 어렸을 때 세자가 되었기 때문인지 자신이 왕을 물려받게 될 것을 전혀 의심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14세까지는 태종도 양녕대군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비록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체구도 크고, 사냥도 잘했으니까요.
그런데, 17세부터 화려한 여성편력이 시작됩니다.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잔치에서 봉지련이란 기생에게 빠져 태종에게 혼이 나고, 갖은 핑계로 공부를 멀리하고, 궁에서 매를 키우고, 장안의 건달을 궁에 불러 술자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양녕대군이 23세 때 평양 기생 소앵과 연애를 즐깁니다. 그러다가 모후에게 혼구멍이 나고 애꿎게 양녕대군을 모셨던 내시들과 신하들만 곤장을 맞습니다.
이때 태종이 1차 경고로 더 이상 방만하게 행동하면 다른 합당한 사람을 찾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후 양녕대군은 칠점생이란 기녀와 연애를 하는데, 칠점생은 양녕대군의 매형이 거느렸던 여자였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월담을 하며 여색을 즐겼는데, 매번 걸릴 때마다 눈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양녕대군이 폐위되는 결정적인 스캔들은 어리라는 첩을 빼앗아 사랑에 빠진 것에서 비롯됩니다. 들켜서 헤어졌지만, 양녕대군 장인이 그녀를 몸종으로 꾸며 다시 양녕과 만나게 해 준 것이 또 들킵니다. 그리고, 또 태종에게 싹싹 빌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양녕대군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태종에게 항의문을 씁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태종 본인은 좋아하는 여인을 모두 궁에 들였고, 본인은 어리가 궁 밖에서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돌봐주었을 뿐이다. 한고조는 재물과 여자를 탐했지만 천하를 평정했고, 진나라 왕광은 어질다는 평을 들었지만 나라가 망하였다. (후략)
결국, 그 내용은 아버지는 마음대로 하면서 나한테는 왜 그러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항변이었죠. 하지만, 태종은 왕권에 도전한 양녕대군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양녕대군은 폐위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25세였고, 세자가 된 이후 1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유배지는 경기도 광주로 정해졌습니다.
2. 충녕대군의 본심
태종실록은 세종대왕 시절에 작성된 문서이기 때문에 양녕대군의 나쁜 점을 강조하고, 충녕대군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기술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간원에서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형제들을 살펴보면, 둘째였던 효령대군은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어서 왕권에 관심이 없었고,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 보호에 힘썼습니다.
넷째였던 성녕대군은 막내로서 총명하고 반듯하여 태종의 귀여움을 차지했으나, 충녕대군 보다 8세 어렸기 때문에 왕권에 도전하기에는 연령이 맞지 않았습니다.
셋째였던 충녕대군은 양녕대군 보다 3살 어렸지만, 어려서부터 공부에 특출 나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갖가지 악기를 익혔으며, 그림, 화초, 수석에 이르기까지 취미활동도 두루두루 섭렵을 했습니다.
특히, 정치의 교본인 유학 교본에 심취했는데, 양녕대군이 탈선을 거듭할수록 신하들 사이에서 충녕대군의 대안론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실록에는 충녕대군이 왕권에 도전하려는 의도를 종종 보였다고 합니다. 위대한 세종대왕님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에 아주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양녕대군이 새 옷을 자랑할 때 충녕대군은 마음을 바로잡은 후 몸을 꾸미라고 충고를 합니다. 또, 충청도로 사냥을 떠날 때 충녕대군의 학문에 대해 태종이 세자인 양녕이 따라가지 못할 학문이라고 충녕을 칭찬합니다. 이에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용맹하지 못하다고 반론을 하죠.
그런데, 태종은 큰일을 당해 결단을 내리는데 충녕과 견줄 만한 이가 세상에 없다고 답변을 합니다.
어찌 되었든 태종은 양녕이 비행을 저지를 때마다 충녕이라는 대안에 마음이 기울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어쩐지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충녕대군도 준비된 임금이라는 자세를 계속 보여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대군과 세자는 하늘과 땅 차이어서 세자는 나중에 임금이 되지만 대군은 왕자의 직함만 있을 뿐 아무것도 못하고 밥만 축내다가 죽기 마련이라, 공부를 많이 한 충녕대군의 입장에서는 임금이 될 수 없다는 현실에 억울했을 수도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충녕대군이 임금 자리에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이 정말 임금자리에 욕심을 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3. 태종의 변심으로 등극한 세종대왕
양녕대군은 어리와 연애를 하면서 이를 막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항의문 한번 잘못 작성했다가 세자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태종도 충녕대군이라는 대안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합니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이후 태종은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뒤 불과 2개월 뒤에 정말 충녕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본인은 뒤로 물러납니다.
앞서 양녕대군은 무려 세자로서 14년을 지냈는데, 충녕대군은 겨우 2개월 뒤에 임금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태종이 정말 엄청난 결정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보통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임금은 물러나기를 최대한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태종은 임금 자리를 18년간 유지하고 깔끔하게 충녕대군에게 물려줍니다.
이는 이미 충녕대군이 보여준 학식과 자세 등으로 임금이 될 소양을 갖추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군왕 교육이 부족하다고 걱정했지만, 충녕대군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왕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비록 태종이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을 죽이는 비인륜적인 일을 벌이지만,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안전하게 물려주고, 그가 정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주변 정리를 한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인정을 합니다.
조금 이상한 점은, 임금 자리에 그렇게 야심을 보이고, 임금이 되기 위해 무슨 짓이 든 마다하지 않고 했던 태종 이방원이 너무 쿨하게 임금 자리를 충녕대군에게 이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태종의 매력이고 업적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때문에 다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실록, 정종 실록, 태종실록을 꺼내서 읽었습니다. 역사의 탐구는 우리 인생을 돌아보고, 여러 사회현상을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 계기를 줍니다.
역사를 좋아하신다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처럼 만화로 된 서적을 추천드립니다. 그냥 글자만으로 된 역사책은 저도 여러 번 읽고 있지만, 머릿속에 그 인물이 상상이 안되는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만화라서 역사가 영화처럼 흘러가는 장면처럼 기억할 수 있어 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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