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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홍국영의 난이 당신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교훈

by 월리만세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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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은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입니다. 일명 '홍국영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놓고 우리가 곱씹어보아야 할 인생의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홍국영은 사극 드라마로도 유명했습니다. 2001년 드라마 '홍국영'에서 김상경 배우가 연기를 했고, 2007년 드라마 '이산'에서 한상진 배우가 연기를 했습니다. 정조를 그린 영화 '역린'에서도 나오는데 박성웅 배우가 연기를 했었죠.

 

 

 

1. 홍국영이란 인물에 대하여 

 

홍국영은 정조 시대의 인물입니다. 홍국영은 25세에 문과에 11위로 급제하여 정계에 입문했는데, 정조가 동궁일 때 동궁전에 부임해서 정조와 인연을 맺습니다. 

 

홍국영은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실의 각종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정보가 임금이 되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냉철한 기획능력과 시와 노래를 잘 부르고 언변이 좋아 놀기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외모가 준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훈남이었던 같습니다. 

 

홍국영은 25세이 정계에 입문해서 33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학업기간을 제외하고 사회생활(정치생활)은 불과 8년을 했을 뿐입니다. 이 짧은 8년간 홍국영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요?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 보면 홍국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홍국영은 머리가 영민하고 정무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있는데, 여기서 정무적인 감각이란 쉽게 말해서 상황판단이 빠르고, 임기응변이 강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권력자인 상전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은 간사한 꾀를 내어 정조께 곧게 충고하는 체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듣기좋은 말이라, 한번 홍국영이 입궐하면 외부 사정에 대해 여쭙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정조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겼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단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에서도 쾌속 성공을 할 만한 타입입니다. 저도 직장생활 20년차이지만, 이런 유형의 사람은 회장 비서실이나 사장 비서실에서 근무할만 스타일인 듯 합니다. 

 

왜냐구요? 

 

내외부의 각종 소문과 정보를 수집해 분석해 주고, 권력자의 정적을 제거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인물을 멀리할 우두머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에 듣기 싫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금상첨화 아닐까요?

 

 

 

2. 홍국영의 성공과 몰락 

 

홍국영은 정조를 임금에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기여한 공으로 성공가도를 달립니다. 

 

영조, 정조 시대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파벌싸움이 심했는데,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는 노론 벽파를 제거해 정조가 임금으로 가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덕분에,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도승지가 됩니다. 도승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생각해 보면 홍국영이 해 오던 일에 딱 맞는 직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왕에게 올라오는 모든 상소와 내부의 정보흐름이 모두 홍국영을 거치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홍국영도 정조에게 충성을 했고, 정조도 홍국영을 무척 신뢰했기 때문에 그의 성공은 사실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조시절에 도승지로 일했던 사람은 총 85명이고, 도승지의 근무일수는 8,520일이었습니다. 그 중 홍국영이 도승지로 근무한 일수는 1,204일입니다. 평균 도승지 1명당 99일인데, 홍국영 혼자 1천일 이상 도승지 생활을 한 것입니다. 

 

더구나, 홍국영은 도승지 뿐 아니라 금위대 대장과 국왕의 호위기관 숙위소 소장도 맡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는 대통령 경호실장이 3군 사량관을 겸했던 것입니다. 

 

그의 위세가 어떠했을까요?  정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정조는 "만약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겠는가"라고 했고, 홍국영 본인도 "7년간 조정의 명령이 대부분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좌의정 김종수는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이야기를 했죠. 

 

이쯤되면 홍국영이 짧은 정치생활 8년간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나요? 그때는 혈통이 있어서 어차피 신하로만 지내야겠지만, 지금이었다면 차기 대통령감, 차기 사장감으로 낙점되어 승승장구하는 인물쯤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결국 홍국영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됩니다. 바로 신하로 만족 못하고 왕권에 도전하게 됩니다. 그것이 홍국영을 순식간에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하죠. 

 

홍국영은 정조를 대신해 반대파를 제거했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손을 잡습니다. 이것이 정조의 눈에는 본인을 위한 것인지, 홍국영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심을 품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기를 건드린 일은 정조 본인의 인척이 되려고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홍국영은 정조가 혼인을 하고 16년간 세자가 없자, 자기 누이를 정조의 빈으로 들여 아들 낳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그 누이는 불과 1년만에 세상을 떠나죠. 그 이후 조정에서 다시 빈을 간택하려 할 때 홍국영은 반대를 합니다. 이런 행동이 정조 눈에 예쁘게 보일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해도 좀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는데, 홍국영은 정조대왕의 형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홍국영 본인의 누이 양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를 세자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성군으로 유명한 정조대왕도 홍국영이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쳐보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말 그대로 역린(용의 가슴에 거꾸로난 비늘, 왕의 노여움)을 건드린 것이죠. 

 

결국, 홍국영은 32세에 정계은퇴를 하고, 강원도 강릉에서 33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풍문에는 폭음을 하면서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정조의 강평입니다. 

 

"홍국영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사료가 올바르지 못한 탓이다. 처음에는 나라의 안정과 근심을 함께 하는데 있어 그의 지위가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임시로 맡겼다. 그런데 스스로 조심하지 않고 상가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을 멋대로 사용해 끝내 극죄를 저질렀다."

 

 

3. 홍국영의 최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홍국영은 정계에 입문한지 8년만에 한 국가의 2인자의 자리에 올랐다가 뚝 떨어져 폭음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치계에도 있었고, 가까이에는 제가 다니는 회사에도 있었습니다. 

 

영업력도 뛰어나고 조직 장악력도 뛰어나 특진을 거듭해 초고속 승진을 한 임원이 있었습니다. 술자리에서 한번 뵈었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 술집의 제왕처럼 군림했으니까요.

 

차기 사장감이라는 소리도 있었고, 오래도록 회사를 지킬 인물이란 소리도 있었지만, 회의석상에서 사장 의견에 반대하는 말 한마디로 잘렸습니다.

 

느낌이 오시나요? 

 

이렇게 큰 성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개인 인생사를 뒤돌아 보면 크고 작은 성공경험을 합니다. 그때는 마치 내가 세상을 다 갖은듯한 뿌듯함이 있습니다. 인생의 교훈은 이럴 때를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성공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잘나갈 때, 성공했을 때 겸손하고 처신을 잘하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정말 한순간인 것입니다. 

 

저는 홍국영이 강원도를 떠돌며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원통하고 후회막심했을 것입니다. 3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가장 건강할 30대 초반에 술로 세상을 떠날 정도면 얼마나 술을 마셨을지...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고 태어났는데 이런 후회로 생을 마감하는건 아까운 일입니다.   

 

 

 


 

최근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먼저 살다간 분들의 인생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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