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계신가요? 14년 만에 MBC에서 드라마 '이산' 이후 최고의 드라마를 냈는데 또 정조대왕을 소재로 했네요. 옷소매 붉은 끝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에 나온 정조대왕의 실제 이야기를 알아야 드라마를 더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실제 정조대왕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운 생활을 했는지 실제 정조대왕의 인생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와 리얼은 다르겠지만, 작가들도 리얼 이야기를 연구해서 극본을 만들었을 테니 우리는 실제 이야기를 알아야 드라마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1. 옷소매 붉은 끝동에 나온 정조대왕 소개
이 드라마는 어떤 모티브로 제작을 했을까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 한 궁녀와 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던 제왕의 애절한 궁중 로맨스 기록!
도깨비보다 무섭다는 왕이 있었다.
왕은 사내이기 이전에 임금이다. 사랑하는 여인보다 일국의 운명이 우선이고, 만백성의 안위가 먼저다. 사랑은 저 먼 끝 순위로 밀려나 버린다.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어야 할 첫사랑조차, 차가운 이상으로 억누르며 정치적으로 계산한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궁녀도 있었다.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어 입은 그녀들, 궁녀... 옷소매 붉은 끝동은 왕의 여인이란 징표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그저 순종적으로 왕과 왕족들을 모시는 허수아비 인형들이었을까? 조선시대, 궁궐 내 기본적인 생활을 관장하는 여관으로서, 궁녀들에게도 그들만의 당찬 꿈과 소박한 행복이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무너진 감정의 둑, 운명을 뒤흔들 홍수가 된다.
사내이기에 앞서 지존이기를 선택한 왕이기에, 사랑마저도 결국 하나의 장기말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상처 받은 여인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심사가 꼬인 궁녀는 감히, 왕의 사랑을 거부한다. 후궁이 되기를 거부하고 궁녀로 남고자 한다. 그럼에도 끝내 서로를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그들. 평범하고자 했으나 결코 평범해질 수 없는 제왕과 궁녀의 사랑을 그리고자 한다.
2.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정조대왕은?
실제 정조대왕은 드라마 모티브처럼 그렇게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만큼 생존하기 위해 더욱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이유는 정조대왕의 아버지가 바로 뒤주 속에서 죽어간 사도세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데,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는 세자로서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세자 책봉 이후 영조의 과도한 기대에 못이겨 엇나간 세자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죄로 뒤주속에 갇혀 굶어 죽게 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정조대왕은 이렇게 죽어간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버지를 죽게 한 영조의 손에 키워졌습니다.
정조대왕은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궁녀와의 사랑 따위는 사실 사치였을 것입니다. 본인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영조는 정조대왕이 모범적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본인에게 효심을 다했기 때문에 크게 불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조대왕 입장에서 보면 생명을 건 게임이었을 것입니다.
정조대왕은 임금으로 등극할 때까지 철저하게 숨죽여 살았고, 영조도 손자인 정조대왕을 번듯하게 임금 자리를 받을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을 시킵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첫째 아들입니다.
효장세자는 정조대왕의 큰아버지입니다만, 왕이 되기 위해 할 수 없이 효장세장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죄인은 절대 임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정조대왕은 임금이 된 이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죄를 벗기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정조대왕은 세종대왕과 함께 대왕의 호칭을 받은 임금입니다.
그만큼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성군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학문적으로 유교주의를 표방했고, 본인 스스로가 유학의 대가였습니다. 정조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는 조선 초기의 사대부 중심의 정치체계였는데, 당시에 당파싸움이 워낙 심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탕평책은 정조대왕의 대표적인 정치전략으로 꼽히는데, 당파와 관련 없이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또, 규장각에서 학자를 키워 당파를 가리지 않고 등용했던 이유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정치를 없애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조대왕이 집권한 25년 간이 바로 조선이 마지막 중흥기였습니다. 정조대왕 이후 조선은 급격히 쇠락하여 망해가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영조의 특별한 관리를 받으며 자란 정조는 본인 스스로가 문무에 뛰어난 군주였기 때문에 조선에 수원화성 축성, 거중기 개발, 궁궐 수비대 장영용 양성 등 수많은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이렇게 후기 조선을 초장기 조선의 모습으로 키우고 싶어 했을 때 세계는 급속도로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자유주의를 찾습니다. 미국도 독립전쟁으로 대국으로 일어섭니다. 중국조차 건륭제가 60년간 평화시대를 이루며 서구의 문물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정조대왕이 국제적으로 눈을 좀 돌렸다면 이후 조선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로맨스 중심이기 때문에 이런 정조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3. 정조대왕인 안타까운 최후
정조대왕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종기 때문입니다.
종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냥 곪아서 염증이 생긴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보통 째서 고름을 빼내고 소독약을 발라주고, 항생제와 소염제를 처방해 줍니다.
대부분 곪은 곳을 째고 소독약 바르면서 소염제 먹으면 대부분의 종기는 낫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종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당시에 종기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제대로 치료를 못 받으면 신체 각 부위로 번지기도 했고, 종기가 나면 온몸에 열이 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정조대왕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부터 종양으로 시달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하루 종일 엄청난 양의 피고름을 하루종일 짜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당연히 열도 많이 났을 것이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왕의 몸에 칼끝 하나 댈 수 없었으니 수술은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기껏해야 침과 한약으로 종기를 다스렸을 것입니다.
당시에 정조의 종기라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었으면 또 세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주로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탐독합니다. 만화지만 내용이 풍부해서 궁금한 시대는 그때그때 들춰봅니다. 4년 전에 한 세트 구입을 하고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구매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참고해 주세요.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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